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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리꼴라리&부끄러움- 의외의 뜻과 유래

문자인문학(문자의 뿌리, 어원)

by 타타오(tatao) 2021. 2. 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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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친숙하게 떠도는 단어-부끄러움,

그런데 놀랍게도 그 뜻을 사람들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제가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를 판단하고자 할땐 이 방법을 쓰곤 하는데요.

화성에서 온 어린 소녀가 제게 묻습니다.

타타오! 부끄러움이 뭐야?”

 

이때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이지 뭐겠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녀는 지구를 떠나고 싶을 겁니다.

그리고 자기 별 사람들에게 지구인에 대해 이야기하겠죠.

지구인들은 신기해. 언어문자의 뜻도 모르면서 쓰더라구. 그게 믿어져?”

 

부끄러움은 붉음 플러스 러움입니다.

붉다-는 둘째치고 러움은 뭐죠? 형용사를 묶어두는 틀입니다. 부러움, 서러움, 자유로움, 새로움, 날카로움, 미끄러움, 껄끄러움, 보배로움, 자랑스러움

그러면 붉다-는 뭐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겠죠? 그건 무슨 일인가요?

제 친구 의사에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혈관이 확장되면서 피가 몰려서 얼굴이 붉어지는 거야.”

그건 표면적인 일입니다. 인간을 오로지 뼈와 살과 피로 뭉쳐진 육체로만 보는 의견이지요.

문자 인문학은 표면에서 배회하는 당신 곁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토끼와 같은 것입니다.

토끼는 심연의 왕궁에서 벌어지는 파티에 참석하려고 바삐 바삐 달려가는 것이지요.

 

부끄럽다는 상태는 인간 특유의 상태입니다. 하마나 코끼리는 얼굴을 붉히지 않죠?

나도 부끄럽다구요

개가 길에 다리 들고 쉬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인간과 비슷하다고 하는 오랑우탄도 민가를 기웃거리며 아랫도릴 가릴 무언가를 훔치려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 부끄러웡

인간은 무엇을 부끄러워하는 것일까요? 부끄러운 일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봅니다.

 

성기가 노출됨을 부끄러워합니다. 왜 일까요? 특히 그냥 노출보다 발기됨을 더욱 부끄러워합니다. 동물적 본성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동물적 본성을 이미 뛰어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틀을 잘 만들어둔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틀이라는 오래된 약속을 깨는 다중을 향한 성욕에 대해서는 자기 비하를 할 만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 부끄러움도 사회가 부여한 틀입니다.

일부일처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인 방향성은 가벼운 부끄러움 정도에 그칩니다.

옆집 잘 생긴 대학생 이야길 할 때면 딸아이의 얼굴이 약간 홍조를 띤다던가… 그건 죄의식까지는 아닙니다. 그저 동물적 본능에 자기가 쏠림을 약간 부끄러워함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은 참 귀엽죠. 얼라리 꼴라리~얼레 꼴레~하고 놀리는 것도 그런 정도의 귀여운 부끄러움을 가지고 놀리는 소리입니다. 얼의 상태가 꼴(얼굴)에 드러났네~!라고 놀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죄의식으로 인한 부끄러움입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못한 아들이 부모님 사후에 부끄러움을 느끼죠.

내가 뒷담화하며 비난하던 친구가 내게 친해지고 싶다고 고백할 때 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친일파를 조상으로 둔 후손들은 자신의 유전자에 대해서까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폭력성까지 느끼던 사람은 자신을 카인의 후예라고 느끼며 부끄러워합니다. 주일에 교회 안 간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밥상을 받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기도 하지요. 나이가 찬 자식이 독립을 못하고 있어도 부끄러워하곤 합니다.

 

참 세상엔 다채로운 각도의 부끄러움이 차고 넘칩니다.

부끄러움, 붉으-러움은 혈액이 얼굴로 올라오는 일이죠?

가슴이 머리로 올라오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성과 감성이 만나는 것이지요.

감성은 더운 피를 타고 머리를 향합니다. 감성은 다른 말로 혼이라고도 합니다.

머리는 이성의 심벌이며 영의 관제탑이고 가슴, 심장은 혼의 거주처라고 하죠.

내 안에 사는 영과 혼은 부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한 몸인데 지금 육체 속에서는 별거 중인 부부입니다. 시험기간이라고 할까요?

머리에게 이 육체를 맡기고 한번 잘해보라고 하는 시험기간 말이죠.

그런데 이 머리가 기껏 육체를 끌고 간 곳이 땡볕 사막입니다. 그러면 가슴이 피를 타고 올라와 따집니다. “으이그 당신 대가리 굴리는 일이 그렇지 뭐!”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에게 인생을 맡겨봅니다. 느낌대로 살아보라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마음껏 살아보라고.

그랬더니 이놈의 가슴이 맨날 하고픈 것만 하며 놀고 마시고 춤추고 연애질이나 하며 살더니 어느 날 사생아를 낳고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모아놓은 건 쥐뿔도 없으면서요.

이럴 때 머리가 가슴을 야단치죠. “맨날 가슴이 노래하는 대로 살고 미쳐야 미친다더니 그 결과가 이거냐? 도대체 언제 철들래?”

그러면 가슴은 받은 열로 피를 데워가며 부끄러워합니다.

이 부부 어떻게 해야 꽁냥꽁냥 잘 살까요?

영과 혼, 이성과 감정, 머리와 가슴의 조화를 이루게 되면 생이 이리저리 치우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끄러울 일도 점차 적어지겠죠.

바로 그 둘이 사이가 좋으려면 분리의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야 합니다. 내 안에 그런 어둠의 벽들을 깨는 것-그게 깨어남이며 깨달음이죠. 벽돌하나가 깨지면 그 너머가 훤하게 보입니다. 더 넓은 시야가 얻어지죠. 그 둘 사이에 불안이 없으면 깨가 쏟아집니다.

감정의 흥을 이성이 가로막지 않고 이성의 잣대를 감정이 무시하지 않죠.

이 내면의 부부가 사이좋은 사람은 실제 부부간에도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둘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얼굴이 붉어질 일이 생기고 자꾸 쪽박을 깨고 선을 넘나들며 사고를 치니 부끄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 머리와 가슴 사이에 생긴 자식이 있다면 누굴까요?

바로 혀입니다.부부 사이가 조화로우면 혀도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 말에 품위가 어려있죠.

부부 사이에 어긋나 있으면 혀가 사고 치고 다닙니다. 혀는 심장이 처음 생길 때 먼저 만들어집니다. 머리와 가슴을 이어주는 기묘한 존재죠. 이 혀만 잘 써도 내면의 평화가 옵니다.

혀를 잘 쓴다는 건 뭘까요?

부드럽게 말합니다.

남을 결합시켜주는 말을 합니다.

속이 꽉 찬 실 있는 말을 합니다.

내가 허공 중에 심은 말들, 사람들에게 심은 말들이 하나 둘 싹을 틔울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환하게 만발할 것이고 그때 하늘 아래 부끄럽지 않은 이들은 당당할 것입니다.

얼에 비친 마음이 얼굴에 비쳐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순백의 마음이 하얀 옷-백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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