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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의 세한도를 지켜온 엄청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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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타오(tatao) 2020. 9. 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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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엄청난 존재다

그런데 그 예술을 지키고 전한 사람들 역시 엄청나다. 이 장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추사가 제주도에 9년 유배생활을 하던 시절-

1-추사에게 귀한 책을 무려 120권이나 보내줬던 역관 이상적

그것은 구하기도 어려운 필사본이었으며 한 권당 집 한 채 가격이었다고 하니 이건 보통 선물이 아니다.

많은 제자나 지인들이 추사가 고관일 적에는 드나들다가 죄를 뒤집어쓰고 유배 중일 떼는 먹물이라도 튈까 봐 두려워하듯 서신조차 보내지 않았던 것을 비교해보면 이상적의 행동은 정말 대단한 마음씨라 할만하다.그렇게 일관된 성심으로 스승을 대한 그는 추사로부터 역사적 작품이라 할 세한도를 선물 받는다.

우선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

그리고 그 세한도를 다시 청나라에 두루 들고 다니면서 학자들로부터 감상문을 받아서 돌아온다. 그것은 추사의 예술혼을 만방에 떨친 대단한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2-후지스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그는 경성 제국대(서울대 전신) 교수를 지낸 문화학자다. 청나라의 옹방강과 완원, 그리고 추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향단이: 잠깐만요. 좀 칼칼한 맛 나게 진행을 제가 도우면 안될까요?

타타오: 아, 어떻게 도울 건데?이거 추사 선생에 대한 묵직한 주제 거리인데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혹시 추사 샘 영혼 소환해서 알랑거리려는 건 아니지?

 

향단이: 제가 지상 신명계에 추사 연구학자 후지스카 지카시를 만나러 왔습니다. 후지스카 샘! 샘은 당시 뭘 연구하셨던 거죠?

추사연구가 후지스카 지카시

후지스카: 저는 청나라와 조선의 학문 이동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죠. 옹방강과 완원 같은 대학자들은 젊었던 추사를 끔찍이도 아꼈었고 사실상 스승 격이었습니다.그들 사이에 국경 따윈 없었죠. 그런 면에서는 저도 그랬습니다.

향단이: 하지만 당신은 일본에 살았을 텐데 어떻게 추사를 연구했죠?

 

후지스카: ! 그 당시 전 종로에 살았었고 인사동 등에서 고서를 훑으며 북경에서 얻은 것과 함께 수만 점의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향단이: 수 만 점?! 그거 문화적 약탈 아닌가요?

후지스카: 전적으로 제 학문적 열정이었으며 자비를 들여 모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연구하여 추사 연구에 첫걸음이 될 논문을 썼습니다. 물론 일본에 돌아와서죠. 그런데 어느 날-한국에서 손재형이라는 젊은 서예가가 저를 찾아왔죠.

손재형: 세한도는 한국의 보물입니다. 제발 제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3-소전 손재형(서예가) 

향단이: 아하! 소전 손재형 선생 말이죠? 그 분은 한국 근대 서예계에서 큰 획을 그으신 분이죠. 그래서 추사 선생 작품의 가치를 알았던 것이고요. 그래서 주셨나요?

세한도를 되찾은 소전 손재형 선생

후지스카: 완강히 거절했습니다만…. 그 친구 아예 우리 집 근처에 하숙을 하면서 매일 저를 찾아와 조르더군요. 거의 목숨을 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한도를 그 친구에게 넘겨줬죠.그 친구도 추사의 문화를 지켜간 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향단이: 그러셨군요. 대박!..... 그러면그러면 나머지 관련 작품이나 물품은 어떻게 하셨나요?

4-후지스카 아키나오(지카시선생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 아!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저는 최근에 세상을 떠난 선친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그 모든 유물을 전하시며 잘 연구하고 논문 화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늙었지요. 죽을 날은 다가오는데 제가 짊어진 짐은 너무도 크고 방대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과천 문화원장 최종수 선생이 날 어찌 알았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더군요!

향단이: 왜요?

후지스카 아키나오: 저는 당시 94세였고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이걸 일본 대학에 기증한들 먼지만 쌓일 것이고, 조카에게 물려줘도 추사에는 문외한이니 의미가 없을 것이었거든요. 과천시는 추사 연구를 꾸준히 해왔고 또 앞으로도 연구할 계획이 뚜렷하니, 기증하는 데에 부친도 만족하실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단이: 선친이신 후지스카 지카시 님 인정하십니까?

후지스카 지카시: 당연합니다. 모든 자료는 연구하는 이의 것이며 향유하는 이의 것입니다.

 

제 아들과 저는 이미 그 부분에 있어서는 둘이 아닙니다. 저도 아들도 후지스카입니다. 저는 사실 그 당시 보이지 않는 완력이 들어가서 당시 이 많은 자료를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는 반성이 있었거든요.

향단이: 네, 그리고 한국 기증의 물꼬를 열어준 전 과천문화원장 최종수님도 중요한 공헌자시네요.

후지스카: 맞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영혼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죠. 그동안 내가 지닌 방대한 자료를 어찌하지 못해 죽지도 못했습니다. 추사 관련 자료가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최원장께서 국제 학술대회에 초대해 주셨어요. 저는 몸 상태상 참여 대신 제 추사 논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죠.

 

 

 

호흡기를 꼽은 채… 남은 모든 힘을 다 해서 논문을 읽었습니다. 마지막 한 줄을 읽을 땐 정말 숨이 넘어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고... 기진맥진한 저는 조카에게 유언을 했죠. 난 내일 죽을 것 같다. 반드시 내 모든 자료를 한국에 보내라!

향단이: (울컥!)ㅠㅠ 그래서 보내셨군요. 장사꾼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잘 보존하셨다가 결국 주인에게 돌려주셨군요.

후지스카: , 추사 작품 26, 그리고 추사 관련 자료 일체-3000점이 넘습니다. 선친께서 넘기신 세한도 부작란도 등까지 하면 추사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넘겼다고 봐도 될 겁니다. 7개월에 걸쳐 120 상자가 비행기로 배로 보내졌습니다. 여한이 없게 되었죠. 저는 아주 편안히 몸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향단이: 유물 연구비로 200만 앤까지 과천문화원에 기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한국에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한 것 아시나요?

후지스카: 네! 저는 죽었으니 갈 수가 없어서 조카가 대신 수상한 것을 봤습니다. 감개무량했지요. 그 훈장은 추사를 지켜온 모든 분들과 나눠가져야 하는데... 특히 최종수 원장님 말입니다.

향단이: 그 마음 감사합니다. 한국의 문화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고프신 말씀 있나요?

후지스카: 3세기에 백제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가져와 학문의 길을 열었듯이, 부친이 모은 자료들이 추사라는 위대한 인물을 새롭게 연구하는 길을 이제 한국에서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향단이: 최종수 선생님께선 지금도 그 후 10여 년 동안 꾸준히 매년 하기야마의 고다이라 공원묘원을 들러 후지스카 가족묘원에 꽃을 바치고 향을 사르며 술을 따른다고 들었습니다.

후지스카: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저희도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추사관련 책을 제단에 펼치고 우리에게 절인사를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짐을 하셨습니다. 추사연구를 이어가겠노라고. 그리고 도쿄의 한국학교에 가시어 추사와 후지스카 가문의 인연에 대해 열강을 하고 가신다죠. 학부형들은 감동을 느끼며 그 강의에 빠져들었고요.

아쉬운 것은 그분이 자비로 매년 일본에 오신다는 겁니다. 나라나 시가 지원을 해주면 좋을 텐데요.

 

향단이: 맞습니다. 학자들은 그래서 언제나 외로운 건지 모릅니다. , 그 소식도 알려드릴게요. 추사 선생의 세한도를 2대째 개인 소장하고 있던 손세기 님 아들 손창근 씨(91세)가 이번에 중앙박물관에 무조건 기증하기로 했답니다.

 

타 타오: 얼과 문화를 지켜가는 아름다운 분들이 많군요!

고맙습니다! 모두 고마워요. 이 글을 끝까지 보신 분들도 그런 횃불이라고 봅니다.

그 고마움의 뜻으로 제가 세한도 영상을 제 딸과 정성 들여 만들었으니 감상해주세요.

www.youtube.com/watch?v=famHRT9uDeI

 

오늘 상당한 분량이었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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